Contents Review

퀸의 전설 ‘보헤미안 랩소디’ 그리고 피카소

지난 주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았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공연을 즐겼다가 맞겠다. 이 영화에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Bohemian Rhapsody’가 발매되기까지 고정관념을 가진 평론가들의 혹평에 당당하게 맞서는 의 태도였다. 당시 6분 길이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음악 산업에서 대중성을 고려한 곡이 아니었다. 그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안 랩소디는 아카펠라, 오페라, 발라드, 하드 록 등 서로 다른 장르를 한 곡에 담아낸 파격적이고 독특한 구성으로 공개와 동시에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특히 발매한 해에 영국 내 9주 연속 1위 신기록을 달성하였고 이어 1975, 1976, 1991, 1992년의 네 해 동안 1위에 오른 유일한 싱글로 기록되고 있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프레디 머큐리 자신의 성 정체성과 성 지향성 사이에서 갈등과 선택, 그리고 그 선택에 따른 고민과 부모님을 비롯한 사람들에 대한 불안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곡이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가사 속 사형수가 죽인 것은, 조로아스터교의 교도였던 자신의 아버지가 상징하는 억압인 동시에 게이였던 프레디 자신의 남성성 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프레디는 뛰어난 예술가였으며, 예술은 단 하나의 이유로 제작되지 않을뿐더러 명쾌하게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음악에 프레디가 있다면 미술에는 피카소를 손꼽을 수 있다.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르네상스 미술의 기초인 원근감과 명암법의 전통을 완전히 파괴한 최초의 그림이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당시 어느 화가의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시도였다. 하지만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비평가들의 반응은 혹독했으나, 뒤늦게 작품을 접한 대중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강렬한 호소력이 느껴진다는 찬사가 이어지자 딴죽을 거는 비평가들도 서서히 꼬리를 감추었다.
 
보헤미안 랩소디아비뇽의 처녀들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시간이 지나도 식지 않았다. 그만큼 당시 음악과 미술계에 시사하는 바가 컸다는 뜻이다. 한때의 거짓 명성은 시간이 흐르면 거품이 꺼진다. 하지만 더러 시간의 무게를 이겨내는 것들이 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와 효용이 더해지는 경우도 있다. 퀸 노래와 피카소의 작품이 바로 그러하다.
 
피카소의 위대함은 입체주의를 탄생시킨 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형태와 재료에도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했고, 예술가는 으레 특정한 유파나 사조에 속한다는 통념을 뒤엎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는 청색 시대(1901~02), 청색~장미색 이행기(1904), 장밋빛 시대(1905~06), 입체주의(1908~14), 앵그르픙 시대(1915년 이후), 초현실주의(1925~39), 앙티브 시대(1946~48), 말년(1945~73) 등을 거치며 부단히 화풍을 변모시켰다. 그리고 그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켜 갔다. 그런 만큼 피카소가 어떤 스타일의 그림을 그렸는지 콕 짚어서 말하기는 불가능하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Bohemian Rhapsody, 2018)

 

그룹 퀸 역시 반항하는 10대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표현한 Sheer heart attack, 기타 연주를 극도로 절제하고 프레디의 피아노로 채워지는 Don't stop me now, 승리자의 벅찬 감격을 감동적으로 표현하는 We are the champions등 특정 영역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퀸과 피카소의 이러한 행보는 무엇보다 어느 한 가지 기치에 국한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부적응자들을 위해 연주하는 부적응자들이라 말했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퀸의 음악이 신선하고 경이롭게 들리는 것은 퀸도 우리도 여전히 그렇기 때문은 아닐까.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ijeong13@naver.com)
 본 칼럼은 <브릿지경제>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