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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릿지 칼럼] 정치인의 자세

오늘날 국내 정치는 ‘정쟁’과 거의 이음동의어가 됐다. 여야를 떠나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묻고 따지지 않으며 비난과 욕설이 난무하는 정치판은 이전투구의 현장이다. 고성과 삿대질은 기본이고 미국에서조차 존칭으로 쓰이는 ‘씨’자도 빼고 직설적이다 못해 천박한 언어로 상대를 비난한다. 아이들이 차마 보고 배울까 두려울 정도다.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이히만 재판을 다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이히만이 가진 세 가지 무능을 지적했다. 타인의 상황을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 생각의 무능, 말하기의 무능이다. 이 세 가지의 무능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한나 아렌트는 말한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무능은 생각의 무능, 말하기의 무능을 낳는다.” 정쟁만 일삼는 정치인들의 행동은 국민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모르는 무능, 생각의 무능, 판단의 무능에서 비롯된다.

세 가지 무능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문제와 사람을 동일하게 본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로저 피셔 교수는 복잡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려면 “사람과 문제를 분리해서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컨대 중요한 문제를 신속하게 결말지어야 할 경우 정해진 기간 내에 정책적 이슈를 먼저 끝내고 나서 여야간의 감정적인 문제는 나중에 별도의 시간을 가지고 해결해가야 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협상에서도 기본적으로 다루어야 할 대상은 사람이 아닌 문제다. 협상은 인간과 인간이 대화로서 상호이해관계를 풀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때로는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모욕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오해와 편견은 더욱 굳어지고 더 나아가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는 것이 불가능해지며 상대와의 신뢰관계도 깨지게 돼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문제는 과연 협상 과정에서 ‘사람과 문제를 분리해서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느냐’다. 대부분의 협상은 인간관계와 뒤섞이는 경향이 강해 사람과 문제를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

 

2013년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서울 롯데호텔에서 ‘한·러 기술자원협력 세미나’를 개최했다. 당시 세미나는 서로의 의견차로 인해 감정이 격해있었으며 준비 과정도 썩 매끄럽지 않았다. 그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인물은 한국 기업의 러시아 진출 여부에 열쇠를 쥐고 있는 세르게이 벨리아코프 러시아경제개발부 차관이었다. 갈등의 상황에서 상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단돈 5000원짜리 배지였다. 양국 국기가 새겨진 이 조그만 배지는 전경련이 2013년부터 방한하는 외국 사절을 위해 준비한 기념품이다. 이 배지를 받아든 벨리아코프 차관은 전경련 관계자들이 오히려 놀랄 정도로 큰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 배지를 달고 세미나장에 나타난 벨리아코프 차관은 열정적으로 러시아 개발 사업에 한국 기업들이 참여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설명했다.

정쟁의 상황에서, 협상의 교착상태에는 서로 인식의 차이를 논의해야 한다. 감정을 드러내거나 상대를 비난하지 말고 문제를 보는 시각을 솔직하고 있는 그대로를 털어 놓는다면 상대는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사람과 문제를 분리하는 것은 한 번 하고 잊어버려도 되는 휘발성의 성질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문제와 사람을 분리하는 지속적인 노력은 여야와 계파 갈등을 넘어 가치 논쟁으로 승화하여 한국 정치 발전의 새로운 동력이 될 수 있다. 

 

글.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ijeong13@naver.com)

본 칼럼은 <브릿지경제>에 게재되었습니다.